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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재일-부처님의 깨달음과 불자의 깨달음-
이    름 : 청량사 (crs@cheongryangsa.org) 조회수 :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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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자랑, 불교의 특징


흔히 말하기를 불교란 깨달음의 종교다.

각(覺)의 종교다.

부처님이란 깨달은 분, 각자(覺者)라고 말합니다.

이 땅에 부처님이 오신 날, 출가하신 날,

열반에 드신 날과 함께 성도재일, 즉

부처님 되신 날을 불교의 4대 명절이라고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여러 불교 명절 중에서도 만약 부처님 되신 날,

성불, 득도하신 오늘이 없었다면 우리는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무명 속에서 헤매고 살았을 것입니다.

대부분 종교에도 그 교주가 탄생하신 날,

돌아가신 날 정도는 기념하고 있습니다.


속가에서도 자신의 생일, 결혼 기념일, 회사 입사일, 자식의 학교 입학일, 졸업한 날, 부모생신, 기제사 등을 맞이하여 가족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념행사를 한다거나 조촐한 식사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은 날을 기념하는 사람이나 종교는 흔치 않습니다. 이는 우리 불교만이 가진 자랑이요, 특징일 수 있습니다.


우리 불제자들은 불교가 깨달음을 중시하는 종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실천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누구나 다 열심히 수행 정진하면 모두가 부처님과 같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무한 가능성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불교 신자는 어느 종교에서처럼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부처가 될 씨앗을 품고 이 땅에 태어난 보배들입니다. 우리는 성도재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이러한 깨달음의 실체를 낱낱이 보여주신 부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고 찬탄하고 예경해야 할 것입니다.

전국의 각 선방에서는 성도재일을 앞두고 일주일간 철야용맹정진을 합니다.

다 아시다시피 철야용맹정진은 일주일간 잠을 자지 않는 수행, 즉 허리를 땅에 붙이지 않고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루만 못 자도 몸의 균형이 깨져서 고생을 하는데 스님들은 일주일간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을 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님들께서 이처럼 성도재일을 앞두고 용맹정진에 들어가는 것은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시기 전에 하셨던 수행을 잠시라도 경험해보고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에까지 오르기위한 것입니다.

또 이날이 되면 전국의 모든 사찰에서도 불자들이 모여서 하루 동안의 철야용맹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 부처님과 같은 수행과 선정, 그리고 해탈의 기쁨을 느끼기 위한 것입니다.


불자 여런분, 오늘 성도재일을 맞이하여 우리 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과연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깨달음을 이루셨을까?

깨달음의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 모두는 부처님같이 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함께 생각해 봅시다.


깨달음이란 수행자만이 오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닙니다. 나이 많은 어른에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아이에게도 깨달음은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된 어린아이도 이렇게 하면 엄마가 나에게 먹을것을 주고, 이렇게 하면 어른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사실 정도는 쉽게 깨닫습니다. 무심코 만진 다리미가 뜨겁다는 사실을 알고는 함부로 만져서는 안되겠다 정도는 순간 깨닫습니다. 또한 항상 다리미가 뜨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얼마 안가면 알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의 일상 생활은 아하! 하는 순간 순간에 무엇인가를 깨달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하니 포기와 깨달음의 과정


인도 설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 옛날 어떤 곳에 고양이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겨우 걷기를 시작한 새끼 고양이가 어느 날 갑자기 어미 고양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엄마, 나는 도대체 어떤 것을 먹고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어미고양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하기를 “꼭 알고 싶으면 오늘 저녁 어두움을 틈타서 옆집에 한 번 가보아라.


내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인간들이 너의 먹을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니 아무 염려 말아라.”고 하였습니다. 새끼 고양이는 밤이 되자 옆집으로 살며시 들어가 장독대 뒤에 숨었습니다. 그러자 한참 후에 그 집의 주인 되는 사람이 밖으로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 “얘야, 비가 올 모양이다.


거기 우유나 고기 덩어리는 뚜껑을 잘 덮고, 닭이나 병아리는 높은 곳에 올려놓아 고양이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해라.” 하면서 방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어린 꼬마들이 몰려 나와서 비설거지를 깨끗이 하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새끼 고양이는 “과연 엄마의 말이 맞는구나, 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내가 먹을 것을 세상 사람들이 친절히 가르쳐주는구나.” 라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고양이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있어서 세상사는 방법을 배웠지만, 과연 우리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어는 누가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깨달음에는 계기가 있어야 합니다.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과거 생애 이미 보살의 행을 닦아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었지만 중생에 대한 연민과 자비로 우리 중생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낱낱이 보여주기 위해 인간의 몸을 나투셨고, 6년 고행의 모습을 보이셨고, 마지막 명상에 들어 동녘에 뜨는 별을 본 순간 깨달음을 이루셨다고 합니다.


물론 동녘에 뜨는 별이 깨달음일 수는 없습니다. 어미 달기 알을 품고 있다가 스무 하루만에 껍질을 탁-, 쪼는 순가 새 생명이 탄생하듯,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생을 통한 수행과 정진으로 인해 한 순간에 진리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 불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난 큰 인연, 동기, 계기를 가졌습니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됩니다.

그것은 부처님과 닮아지려는 노력입니다.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방법 등을 잘 살펴보고 실천한다면 우리도 깨달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생각이 많아서 오늘 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어제 느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하! 하고 어느 순간 생각하면서도 우리 중생은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다 잊어버리고 새롭게 또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잘못된 습성을 과감히 버리려는 노력도 부족합니다.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할 수 없이 그릇된 줄을 뻔히 알면서도 또 대충 적당히 행동하고 맙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과정은 한마디로 위대한 포기의 연속이었습니다.

부귀와 영화가 보장된 왕자의 지위를 포기했고, 행복과 안락이 보장된 가정을 떠났으며, 당시 모두가 의심하지 않는 사상과 가치관 마저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고행자라는 명예도 포기했습니다. 모두가 외면할지라도 참된 것이라면 주저 없이 결단을 내리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당시 마왕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끝가지 참고 견디면서 오직 진리를 향한 정진만을 계속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도를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 중생과 다른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중생은 권력과 명예, 부를 소유하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면, 부처님은 이들을 다 버렸다는 사실이 다른 점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깨달음을 향한 것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다 포기하고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마음


오래 전 봉선사에 주석하고 계셨던 운허 스님께서 신도들에게 법을 설하시면서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백지 한 장 차이다.

속된 말로 부처는 아홉이라는 숫자를 가지고 사는데, 중생은 욕심이 하나 더해져서 망통, 따라지 인생을 산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어떤 것을 선택해야할 시점에서 올바른 가치판단을 한다는 것은 깨달음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포기를 할 수 있는 순간 판단력, 마왕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 이러한 것들이 있었기에 부처님은 오늘날까지 우리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욕심 부리지 않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부처님은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를 확연히 깨달으셨기 때문입니다.


《중아함경》에 의하면 부처님의 깨달으신 내용은 한마디로 연기(緣起)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기의 가르침이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태어남으로 저것이 태어난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이 사라진다.”(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께서도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을 떠났다가 도중에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이루셨는데, 그 오도송이 “유심생고종종법생 유심생멸종종법멸(唯心生故種種法生 唯心滅故種種法滅)”이라 하셨으니, 더럽고 깨끗한 것이 밖에 있지 않고 오직 마음에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어느 누가 새롭게 만든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간에, 원효대사가 어디에 태어나시더라도 변함없는 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아함경》에서는 “연기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그리고 연기를 보는 자는 부처님을 본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깨달음의 핵심인 이 연기법, 이 연기법을 깨달으신 후 부처님은 이 세상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위없는 대 성인이 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 직후 녹야원으로 가던 도중 우파가마라는 외도를 만났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당신은 누구를 스승으로 삼았으며, 누구를 따라 출가하였으며, 뜻으로 즐기는 것은 누구의 법입니까?”

“나는 이미 모든 세간을 항복 받고서 가지가지 지혜를 성취하였네. 모든 법 가운데 염착하지 않고 일체 사랑의 그물을 길이 벗어났네. 능히 남을 위해 모든 신통을 설하니 이러므로 일체지라고 이름하노라.

내 이제 세간의 공양을 받을 만 하여서 자재로 이 무상존(無上尊)을 이루었노라.

일체 천상, 인간, 세계 가운데 오직 나만이 모든 마군을 항복 받았네.

나는 스승이 없이 안으로 스스로 깨쳐서 세간에 다시 더불어 짝할 이 없노라.

(중략) 내 이제 묘한 법바퀴를 굴리려 짐짓 저 바라나성으로 가노라.

어두운 중생을 다 깨우쳐 감로의 북을 치고 문을 열리라.”

한글대장경 16권《불본행집경》제33권

<전묘법륜품상> 62-63쪽


이는 부처님께서 진리를 깨달으신 것을 만천하에 선언한 자각선언(自覺宣言)입니다.

우리는 일체의 승자(勝者)이시며 일체의 지자(智者)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는 불제자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이런 분이 우리 부처님이란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뿐만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불은 부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이룩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 불제자들은 적극적인 수행의 정진을 통하여 성도는 곧 내가 이룰 경지라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성도 잔치상을 차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부처님과 같이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수행방법이 있겠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바라밀의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중생에게 보시하고 편안히 참고 정진하여 선정과 지혜 닦으며 경을 읽고 외우며 경론 베끼고 불보살께 절하여 명호 부르라.

혹은 부처님의 탑을 고쳐 세우고 스님들의 수행하는 방을 지으며 성인 모습 빚거나 그림 그리며 오래된 경과 불상 새로 고치라.


혹은 삼보 공덕 노래로 읊조리고 깨끗이 탑 치우고 꽃을 올리며 향을 살라 공양하고 등을 밝히며 혹은 음악 연주하여 공양하여라.

혹은 스승과 어버이 모셔 섬기고 세간에 어진 일과 정의 행하며 어르신을 공경하고 아이 아끼며 모든 중생 슬피 여겨 살필지니라.

혹은 남의 착함 따라서 기뻐하고 겸손한 뜻 부드러운 말을 행하여 맞음 따라 하나라도 행해 간다면 마땅히 부처님의 도 이루리.


『석가여래행적송』, 조계종출판사, 327-328쪽

한글대장경 41권《법화경》<방편품>31-34쪽 참조


물론 우리 불제자들이 성불을 위하여 이상의 육바라밀을 모두 갖춰 행하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마땅함과 좋아하는 바를 따라 다만 한 가지만 닦아도 된다고 <법화경 방편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범부와 성인의 차이


이제 우리는 이러한 바라밀의 실천을 통해서 성불의 인연을 짓고 참다운 불제자로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흔히 말하기를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한 생각을 바꿔먹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공부를 많이 하신 불교신도 한 분이 언젠가 이런 질문을 제게 하였습니다.

도대체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구별됩니까?


겉모습부터 모두 다른지, 우리와는 생활 자체가 다른지, 먹고 입는 것도 다른지 모든 것이 대단히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도 그런 질문을 했던 제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부처님은 때때로 괴로움에 대해서 비구들과 문답하던 중에 현자(賢者)와 어리석은 자, 또는 범부와 성인의 차이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은 괴로움의 느낌을 낸다.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들도 또한 괴로움의 느낌, 즐거움의 느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낸다.


모든 비구들이여, 무릇 성인(聖人)은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중략)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은 몸이 부딪쳐 모든 느낌이 생기어 모든 고통을 더하여 목숨을 빼앗기게까지 되면 근심하고 원망하며, 울고 부르짖으며, 마음에 미친증이 생기느니라. 그때에 있어서는 두 가지 느낌을 더하고 자라나게 하나니, 혹은 몸의 느낌이요,

혹은 마음의 느낌이니라.


비유하면 사람이 몸에 두 개의 독한 화살을 맞으면 지극히 고통스러우니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도 또한 그와 같아서,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의 두 가지 느낌을 더하고 자라게 하여 지극히 고통스럽다. (중략)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몸이 부딪쳐 괴로운 느낌이 생기어 큰 고통이 들이닥치어 목숨을 빼앗기게까지 되더라도 근심, 슬픔, 원망, 울음, 부르짖음, 마음이 어지러워 미친증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 때에 있어서는 이른바 몸의 느낌인 한 가지 느낌만 생기고 마음의 느낌은 생기지 않느니라. 비유하면 사람이 독한 화살을 받아도 둘째의 독한 화살은 받지 않는 것과 같이, 그 때에 있어서는 이른바 몸의 느낌인 한 가지 느낌만 생기고 마음의 느낌은 생기지 않느니라.”

 

한글대장경 5권 《잡보장경》 제117권 <전경> 495-496쪽


이는 예컨대, 첫 번재 화살에 찔리더라도, 다시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정법을 알기 때문에 혹 오욕의 낙수를 받더라도 그는 이에 집착하지 않아 그 마음이 흔들리거나 그 의지가 혼란해지지 않습니다. 또 만약 고수(苦受)를 맛보더라도 그는 고수에 대해서 진에를 내지 않기 때문에 또다시 번뇌를 혼란하지 않습니다.

이를 두고 두 번째 화살을 받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해서 고락(苦樂)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끼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면 사랑스럽다고 느낀다는 뜻입니다.

 

또 추한 것을 보면 추하다고 느끼고 미운 것을 보면 밉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도 우리 중생과 같은 모습을 갖고 있되, 제2의 화살은 받지 않는다는 가르침, 집착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마음이 흔들리거나 그 의지가 혼란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단지 제행무상의 이치를 알기에 마음이 평화로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하여 말미암아 일어나고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은 조건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다는 연기의 법칙을 깨달았다는 그 말씀을 기억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깨달음의 날이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하루하루 무엇을 버릴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 자신의 삼독심은 어느 정도인지, 집착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보고 어느 것을 줄여나갈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바쁘게 살다보면 현대인들은 자기를 잃어버리고 일에만 매달려 정신없이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심으로 해서 불교가 이 땅에 탄생한 날인 성도절을 맞이하여 한 가지라도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꺼번에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하기 어려우면 단계적으로 계획을 세워 실천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제 오늘 신묘년 납월 8일 성도재일을 맞이해서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왔던 생애를 돌이켜보고 반성하면서 깨달음을 향한 큰 발원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내가 지금 서있는 위치에서 무엇을 버리고 포기할 것인가를 계획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내년 성도재일에는 우리 모두 여기 저기 잔치상을 한 번 차려 봅시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 글쓴 날짜 | 2011-0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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