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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신앙과 영가천도
이    름 : 청량사 (crs@cheongryangsa.org) 조회수 :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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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 돌고 도는 생명체들


불교의 사후세계는 부처님의 뜻이나

어느 신의 뜻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의해서 결정되며,

중생은 업력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에서는

매년 음력 칠월 보름 백중절을 우란분재라고 하여

목련존자의 효심을 본받아 선망부모와 역대조상의

극락왕생을 불보살님 전에 기원해 왔습니다.

우란분재의 유래는 효성이 지극한 목련존자가

생전의 악업으로 악도에 떨어져 갖은 고통을

받고 있던 어머니 청제부인을 지극한 효성과

부처님의 가피력에 힘입어 악도(惡道)에서

구출하여 천상세계에 왕생토록 한

눈물겨운 고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가 천도는 삼악도의 중생을

삼선도 또는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것을

천도(薦度)라고 하는데 부처님께서 1년 중

특히 음력 7월 보름에 우란분재를 지내면

그 공덕이 가장 크다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 불자들은 이 날을 기해 천도의식을

봉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행사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이해를 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해야겠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되살아나 승천하였다고 하여 부활절이란 이름으로

성대한 행사를 거행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부활은

어느 특정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의 생명의 실상이요,

모든 생명체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됩니다.

이러한 모든 생명체들의 삶은 단 한 시기의

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끊임없이 윤회한다는 것이죠.

이는 마치 누에가 번데기로 변했다가

다시 나방이 되는 것처럼 삶의 겉모습이

변화를 계속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사윤회는 인연집합체인 육신과

무명에 쌓인 업식(業識)의 생성과

소멸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그 육체의 주인 격인 무명에

가린 업식(業識)은 윤회의 근원을 끊어

해탈하지 않는 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의 본체는 생사가 없기

때문에 불변하다고도 하지요.


어느 종교에서나 사후세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사후세계는

인간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절대신의 절대 위력에 의해

피동적으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는 인간의 선악행위는

단지 사후세계의 보조적인 요소일 뿐,

천당과 지옥의 열쇠는 오직

신의 의지에 있다고 하지요.


선악의 기준 역시 신에 대한 순종여부이지

결코 인간적인 기준에서의 선악이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결코 사후의 향방에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뜻이나 어느 신의 뜻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양자의 차이는 참으로 큽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신(神)의 섭리에 의해

사후세계가 결정되므로 인간 의지는

전혀 개입할 소지가 없지만,

후자는 인간 스스로의 능력에 따라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와 같이 피동적인 삶과 주체적인 삶,

즉 타의에 의한 사후세계와 주체적인 삶과

주체적인 사후세계의 차이는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나 불자라고 해서,

불교신앙을 갖는다고 해서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다음 생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자신의 업력에

수동적으로 끌리어 다음 생을 받습니다.

그러니 역시 신이나 어떤 존재가

주관하는 것은 아니죠.

그런데 수행이 높은 사람은

생사를 자유자재할 수 있기 때문에

다음에 어떤 형태의 삶을 택하느냐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그렇지 못한 중생은 업력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죠.


이를 좀 더 말씀드리면 우주의

물리적인 순환도 윤회요,

육도를 유전하며 받는 생(生)도 윤회요,

생사의 변이 또한 윤회입니다.

우주의 자연 변화, 가령 춘하추동

사계절의 변화라든지 과거·현재·미래

삼세의 유전(流轉), 어김없이 교대하는 낮과 밤,

이 모두가 시간의 윤회요,

여기저기 이곳저곳 또 동서남북의

방위변환은 공간의 윤회입니다.


바람과 구름이 엉켜 비가 되고,

빗물은 다시 태양에 증발되어 수증기로

변했다가 구름이 되고, 구름은 다시 비로 변해

한 바퀴 도는 것은 자연의 윤회현상입니다.

차를 몰려면 휘발유가 필요한데,

휘발유는 열에너지를 만들고,

열에너지는 이산화탄소로 변하며

이산화탄소는 다시 다른 형태로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가 시간이 흐르면 또다시 연료로

만들어져 사용되니 이 또한 윤회입니다.

또 우리가 먹는 채소도 소화작용을 거쳐서

배설되면 배설물은 분뇨로 되고 분뇨는 다시

채소의 거름이 되니 이 역시 윤회입니다.

한마디로 돌고 도는 생명활동입니다.



오직 스스로가 윤회의 주인일 뿐!


윤회를 분명하게 이해함으로써

윤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야지

무턱대고 믿어서는 안 된다.

윤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을 때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윤회는

육도(六道)윤회로써 불법에 의하면 사람의 생은

시시각각 윤회 중에 있으며,

단지 빠르고 늦은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니,

늦은 변화를 생멸(生滅) 혹은 변이(變異)라고 하고,

빠른 변화를 윤회라고 합니다.


중생은 삼업이 짓는 힘, 즉 업력에 의해서

시작과 끝이 없는 생명의 흐름이 형성되며

하늘이나 사람·아귀·축생 등 여섯 가지의 다양한

생명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육도윤회한다고 합니다.

육도윤회의 깊은 도리는 우매한 중생은

믿지 못하므로 옛사람이 “경전이 아니고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이 아니면

이 말을 할 수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윤회는 결코 신앙의 체계나 이론이 아니며

더욱이 인생의 냉혹함을 피하기 위한

무정(無情)의 최후의 재판,

즉 죽음에 대한 심리적인 위안이 아닙니다.

윤회는 전생과 내생을 해석하는

정밀하고 정확한 과학입니다.

그러므로 윤회를 분명하게 이해함으로써

윤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야지

무턱대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윤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을 때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윤회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윤회사상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인간은 윤회를 하며 생명을 부여받는다는

사실을 굳게 믿을 때 우리 인생은 결코

백 년의 짧은 세월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생이 끝나면 다음 생이 시작되고

태어나면 죽고, 죽으면 다시 태어나고,

이렇게 끊이지 않고 생이 계속되므로

희망이 무한합니다.

나무를 태울 때 나무 한 토막이 다 타고나면

다시 한 토막을 얹고 이렇게 한 토막 한 토막

얹다 보면 비록 나무는 각각 다르지만

계속 타들어 감으로써 불길은 영원히 타오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는 육도 속을,

때로는 평범한 사람으로 또 때로는

천상 사람으로 형태를 바꾸며 윤회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타오르며

지혜의 등 또한 영원히 타오르고 있습니다.

윤회는 우리의 생명을 우주와 하나가 되게 하고

과거와 현재를 서로 존재하게 하며,

만겁이 지나도 우리의 생명을 더욱 새롭게 합니다.


사람들은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법망은 넓고 성글어 때때로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은

오직 인과와 윤회 앞에서만이

평등을 누릴 수 있다고 봅니다.

고관대작이나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은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목(杜牧)은 그의 시에서 ‘이 세상에서 공평한 것은

오직 흰 머리카락, 귀인의 머리라고 해서

결코 너그럽지 않다’고 했으니

시간과 세월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판사이며

생로병사는 아무도 차별하지 않는 재판관입니다.


인과와 윤회는 결코 절대적인 신에

의해서 조종받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이나 조물주라고 해서

지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의 뒤바뀐 행위가 가지가지

무명의 업식을 불러일으키고,

그 업식이 천차만별로 생사고락의

과보가 나타나게 합니다.


어느 여섯 살 난 신동(神童)의

수학적 재능을 대학교수들조차 따라갈 수 없는

사례가 있는데 그의 천부적 재능은 결코

금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 생부터 누적되어 온 것입니다.

이를 두고 일반 사람들은 전생부터 닦아 온

지혜라고 하지만 사실은 윤회의 사슬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인간의 삶은 결코

신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그 삶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자신의 업력이라고 합니다.

모든 화나 복은 바로 우리자신이 짓고 받는 것으로

윤회의 관점에서 보면 유정중생(有情衆生)은

완전한 자유평등의 개체로서 스스로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창조하기도 하고

비참하고 불행한 인생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신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지배할 수도 없고

우리의 죄업을 은폐시켜줄 수도 없으며,

또한 우리가 이미 소유한 공덕과

행복을 박탈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인과란 윤회 앞에 투기라든지

요행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조물주가 될 뿐입니다.

더러는 “과거와 미래를 알 수가 없는데

현실생활 가운데서 어떻게 윤회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합니까?”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선인선과가 중요한가?


업력의 선악에 의해 우리의 미래생명

방향이 결정되므로 어떻게 선을 쌓고

악을 순화하는가 하는 것이 미래의 행복을

보장받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남의 귤 밭에 들어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귤을 따먹었습니다.

주인은 이 광경을 보고,

“네가 감히 내 귤을 따먹다니!”

주인은 화가 나서 그를 꽉 붙잡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러나 귤을 훔친 사람은 태연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귤을 훔치지 않았소.”

“뭐라고 이 귤은 내가 심은 것이야.

지금 내 귤을 따서 먹고 있으면서도 발뺌을 하려고 해!”

주인은 화를 냈습니다.


“허! 당신은 귤을 땅에 심은 것이 아니고,

탱자를 땅에 심은 것 아니오.

내가 먹은 귤은 탱자가지에 매달린 귤인데

당신이 심은 탱자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이 사람은 당당하게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탱자가지에 달린 귤은 탱자의 가지가

자란 것으로 서로 인과관계 속에 있듯이

우리의 생명 또한 귤이 자라는 것처럼

끊임없이 태어나고 이어지면서

무상(無常)하게 유전(流轉)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윤회사상은 무아(無我)사상과는

서로 모순되는 관계가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근본교의는 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모든 존재가 고정 불변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제법이 무아라면 어찌

윤회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결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무아라는 말은 생명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오온(五蘊)과 사대인연(四大因緣)의

화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은 바로 인연에 의해서 생겼기 때문입니다.


본래 영원불변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아와 윤회는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마치 한 덩어리의 황금으로 여러 형태의

악세 사리를 만들더라도 황금의 본질이

변하지 않듯이 우리의 생명 또한 어느 순간에

이것이 되는가 하면 어느새 저것이 되고,

나귀와 말이 되는가 하면 인간과 천상계를

오락가락하며 끊임없이 윤회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윤회하는 것은 우리 몸이 아니라

몸과 어울려 있는 홀연히 일어난 무명의 업식입니다.


그러면 그 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업식입니다.

그렇다면 이 업식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불교에서는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라고 합니다.

아뢰야식은 생명이 생을 받는 근본식(根本識)으로서

갖가지 경계를 접촉하여 갖가지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하였다가 어떤 인연이 부합되면

갖가지 행동과 현상을 만들어 냅니다.

중생은 날마다 신구의 삼업으로 끊임없이

업을 짓는데 때로는 선업을 짓기도 하고

때로는 악업을 짓기도 합니다.


이러한 업의 인연은 크게 두 가지 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줄다리기 시합처럼 만약

선업의 힘이 세면 중생은 천(天)·인(人)·아수라의

삼선도에 태어나게 되고,

악업의 힘이 세면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에 떨어져 고통을 받습니다.

이처럼 업력의 선악에 의해 우리의 미래생명 방향이

결정되므로 어떻게 선을 쌓고 악을 순화하는가 하는 것이

미래의 행복을 보장받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 계속~)

| 글쓴 날짜 | 2010-0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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